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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 편 대학의 설립과 발전 개관
작 성 자 65년사 편찬위원회 조회 1797 작성일 2011. 10. 12 오전 10:0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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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대학의 설립과 발전

 

 

<개 관>

이강혁 선생이 조명기 선생과 함께 경기대학교의 모태인 조양보육사범학교를 설립하여 개교한지 올해로 65주년을 맞이한다. 우리대학의 기원을 ‘경기’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경기여자초급대학(하초학원) 혹은 4년제 경기대학(경기학원)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의견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난 수 십 년간 조양보육사범학교가 개교한 1947년을 기준으로 매년 개교 기념행사를 해왔고, 또한 이러한 사실에 바탕하여 1987년에는 경기대학교 40년사를, 1997년에는 50년사를 편찬했기 때문에 우리대학의 역사를 65년 전 조양보육사범학교를 설립한 시점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에는 이론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다루는 제1편은 경기대학교의 모태인 조양보육사범학교가 설립된 1947년부터 경기대학의 캠퍼스가 수원으로 확대되기 직전까지인 1979년 8월까지를 대상으로 한다.

 

‘경기대학교의 전신인 조양보육사범학교의 설립과 설립자 이강혁 선생’

우리 민족의 실정에 맞는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유치원 교육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던 조명기 선생이 당시 ‘조양유치원’을 유지·경영하던 한진달 재단과 교섭하여 동 재단을 모체로 군정청 문교부로부터 1947년 11월 1일자로 조양보육사범학교의 설립 인가(문고 제55호)를 받았다. 그리하여 1947년 11월 7일 경기대학교의 모태인 조양보육사범학교가 정식으로 개교식을 거행하였다. 조양보육사범학교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 265번지에 교사를 두고 수업 연한 2년의 본과와 1년의 전수과로 출발하였다.

이처럼 우리 대학은 65년 전 설립된 조양보육사범학교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의 학교법인은 한진달 재단(이사장: 이강혁)이었으며 초대 교장은 이강혁 선생이 겸직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학교 운영은 조명기 선생이 담당했다. 따라서 경기대학교의 최초 설립자는 이강혁 선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양보육사범학교는 개교한 지 2년 8개월 만에 한국전쟁을 맞이하여 부득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휴전이 성립된 뒤인 1953년 9월, 전란으로 인하여 무기한 휴교에 돌입한 지 실로 3년 여 만에 재 개교를 하게 되었다.

그 후 1954년 4월 15일 조양보육사범학교는 ‘문고 616호’로 초급대학으로 인가받아 비로소 보육과, 교육무용과, 아동문학과 등 3과를 갖춘 조양보육초급대학으로 승격되었고 초대 학장에 이강혁 선생이 취임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4월에는 동국대 전문부 구교사인 명륜동 교사로 학교를 이전함과 동시에 조명기 선생이 제2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하초학원의 조양보육초급대학 인수와 경기여자초급대학으로의 개편’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한진달 재단은 학교 경영에서 손을 떼게 되고, 1955년 1월 25일자로 재단법인 하초학원(이사장: 이상근)이 조양보육초급대학을 인수, 경영하게 되었다. 조양보육초급대학은 1955년 4월 11일부로 아동문학과를 국문학과로 개편함과 동시에 교명을 ‘경기여자초급대학’으로 변경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우리 대학의 교명에 ‘경기’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하초학원에 성암의숙 이사진의 참여’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문교부의 대학 정비로 경기여자초급대학은 또다시 존폐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강화된 대학 설치 기준에 못 미치는 교사 문제로, 교사를 확충하지 못할 경우에는 1957학년도부터 학생모집을 중지하게 될 상황에 처했다. 조명기 학장의 노력으로 성암문리학교 건물을 경기여자초급대학에서 사용한다는 조건 하에 손희장, 손상교 선생 등 성암의숙 관계자들이 1957년 4월부터 하초학원의 이사진에 참여하게 되었다.

‘경기학원의 설립과 경기초급대학으로의 개편’

하초학원은 1957년 11월 27일 경기여자초급대학의 운영권(설립권) 및 기본재산을 성암의숙에 무상 양도하였고, 성암의숙은 하초학원을 인수·합병함과 동시에 재단 명칭을 경기학원으로 변경하였다. 이때 하초학원이 경기학원에 무상 양도한 재산은 양주군 걸산리 산119와 산125 약 12만평, 대구시 산격동 846-1 외 21필지 대지 894평, 성북구 돈암동 505-3 대지 71평 및 건물 25평 그리고 농림부 발행지가증권(3216석 2두) 등이었다.

경기여자초급대학은 1957년 12월 남녀공학인 경기초급대학으로 개편하였다. 1958년 4월부터는 교육무용과와 국문학과를 폐과시키고, 문학과와 상학과를 신설하였으며, 2부에 국문과·영문과·상경과 등의 학과를 설치하였다. 보육사범학교로 출범한 지 10여년 만에 여성교육이라는 제한된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당시 손희장, 손상교 선생 등은 충정로 산중턱에 위치한 장안중학교를 운영하던 동흥학원을 1959년 4월 인수하여 성암학원을 설립하였다. 성암학원은 장안중학교를 성북구 미아리의 경기초급대학 교사로 이전시키고 장안중학교의 교명을 인창여자중학교로 변경하였다. 그 후 손희장, 손상교 선생 등은 성암여자중·상업고등학교(구, 인창여자중·상업고등학교)를 육성하기 위하여 경기학원 소유의 미아리 인근의 대부분의 토지 및 건물들을 성암학원으로 무상 양도하게 된다.

경기초급대학은 1959년 7월 교사를 현 인창고교 교사내의 건물(경기학원 소유, 건축비는 지가증권 매도 등을 활용)로 이전함으로서 비로소 우리대학의 충정로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하지만, 경기학원이 미아리 캠퍼스를 포기하고 충정로 캠퍼스로 대학을 이전한 것은 후일 경기대학이 다시 수원으로 이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게 된 것이다.

역사의 분수령인 4·19와 5·16을 맞게 되면서 한동안 대학 발전이 정체되었으나 1962학년도부터는 교명을 경기실업초급대학으로 바꾸면서 다시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곧 대학편제가 주간부 6개 학과(보육과, 의상과, 상과, 관광과, 공예과, 토목건축과) 정원 400명과 야간부 4개 학과(의상과, 상과, 공예과, 토목건축과) 정원 240명으로 늘어났으며, 교수진도 대폭 강화되었다. 그리고 1963학년도에는 다시 보육과, 상과, 관광과, 공예과, 토목과, 건축과, 행정실무학과, 가정과 등 8개학과 주야간 총 정원 1,280명으로 확장되었으니, 초급대학 규모로는 상당한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대학과 재단에서는 이와 같은 발전을 토대로 4년제 대학의 개설을 위한 준비를 해 나갔다.

 

‘4년제 경기대학으로의 개편’

1963년 12월 재단법인 경기학원은 문교부에 의해 학교법인 경기학원으로 조직이 변경되었다. 그리고 문교부로부터 2년제 초급대학의 2부 폐지와 4년제 2부 대학의 설립을 인가받았다. 1964년 2월에는 문교부가 대학 정원을 조정하면서 다시 주간 대학으로 변경 인가를 받았다. 이때 승인된 설치 학과는 가정과·관광과·상학과·국어국문학과·행정학과 등 5개 학과였으며 총 정원은 440명이었다. 초대 학장에는 손상교 선생이 취임하였다. 주간 초급대학은 다시 주간에 4개 학과(보육과, 토목공학과, 건축공학과, 가정과) 정원 320명과 야간 4개 학과(경영과, 관광과, 상과, 행정실무과) 정원 320명으로 조정되었다.

 

‘경기학원 재산의 처분과 성암학원에로의 증여’

1963년 11월20일 문교부에 제출한 경기학원의 재산 현황 중 성암의숙에서 편입된, 즉 경기학원 설립시 성암의숙에서 편입된 재산 중에서 1963년 11월 20일 당시 남아 있는 부동산은 12개 필지의 토지와 미아리 소재 건물이었다. 이들 중 건물과 7개 필지의 토지는 직접 성암학원에 증여하였고, 5개 필지의 토지는 매매 처분을 하였다. 그런데 처분된 토지 중에서 4개 필지는 성암 가족 혹은 성암 관련자에게 매도되었고, 그 중 일부는 다시 성암학원에 증여되었다. 즉, 성암의숙에서 경기학원에 편입된 부동산은 1966년 10월까지 증여 또는 매매를 통하여 모두 처분되었다.

‘교시 진·성·애는 1961년 이외윤 교수가 제청, 교가는 조명기 선생 작사, 나운영 선생 작곡’

1960년대 초 우리 대학의 교가는 건학정신 등을 고려하여 작사는 조명기 학장이, 작곡은 나운영 선생이 하였으며, 교시는 교학국장을 맡고 있던 이외윤 교수의 제청과 조명기 학장 및 손상교 부학장의 숙의를 거쳐 진·성·애로 확정되었다. 교시는 이희승 선생의 해설을 거쳐 그 뒤 전형대 교수, 이운형 교수 등에 의해서 재해석 되어, 현재 우리 대학의 교육이념 및 건학이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손상교 전 학장의 부도와 경기학원 이사진의 재구성’

손상교 선생은 고령인 손희장 선생을 대신하여 재단 및 학교일을 맡아 하면서 ‘경인기업’, 갈포공장 등을 경영하였으나 많은 채무를 안게 되었고, 월남 경기에 착안하여 자갈수출 사업에 손을 대었다가 급기야 1966년 10월 부도를 내게 되었다. 손상교 전 학장의 부도 사건은 당시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으며(동아일보, 경향신문 등에 수차례 보도됨) 금액도 그 당시 돈으로 약 2억 수천만 원에 달하였다. 이로 인해 부정수표단속법위반협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손상교 선생은 1966년 10월 20일 경기대학과 경기실업초급대학의 학장직을 사임하였으며, 이듬해인 1967년 5월 6일에는 기존의 경기학원 임원인 손상교, 이원희, 박상길, 조명기 이사와 이흥배 감사가 모두 사임하고 그 대신 문교차관을 역임한 최형규 선생을 이사장으로 하는 새로운 이사진이 구성되었다.

 

‘전병두 학장의 취임과 수원 캠퍼스 확장’

 

정원 초과 모집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이외윤 학장에 이어 전병두 선생이 1968년 8월 12일 학장서리로 임명되었다. 경기대학은 손상교 전 학장의 부도에 따른 문제들을 극복하고 1970년 8월 연건평 700평인 7층 콘크리트 건물(현재의 서울 학교 본관 건물)을 완공하는 등 대학 발전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1970년대 말 당시의 충정로 캠퍼스의 면적은 11개 필지에 총 2,388평이었으며 건평도 5천여 평에 불과하였다. 1964년 4년제로 개편한 후 15년이 지난 1978학년도에도 12개 학과의 입학정원이 420명에 불과했다. 대학의 확장을 위해서는 수원으로의 이전이 불가피하였다. 수원 이전이 인가되면서 바로 입학정원이 900여명으로 늘었고, 이전 후 1981학년도에는 수원, 서울 양 캠퍼스에 35개 학과로 확대되었고 입학정원도 2,262명으로 늘어났다. 경기실업초급대학은 1974년 야간부 그리고 1978년에는 주간부가 폐과되어 1979년 2월에는 완전히 폐고되었고, 그 대신에 4년제 야간학과가 신설 및 증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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